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4.19 혁명/진행 (문단 편집) ==== 고등학생 ==== 3.15 부정선거 후 마산 앞바다에서 [[김주열 열사 사망사건|김주열의 시신이 떠오르면서]] 가장 분개한 사람들은 실제 같은 나이 또래인 [[고등학생]]이었다. 이들은 시위에 먼저 나섰고 열성적으로 참여하였다. 하지만 서울의 4.19 당일 시위 주도층이 대학생이었고 이후 국민 전체가 들고 일어서면서 대표면담 등 협상은 어른들에게 맡기는 분위기가 되었으며 그러다 보니 고등학생들의 활약은 언론에서 묻혀 지금은 잘 알려지지 않게 된 것뿐이다. 특히 당시 지방에는 각 시도에 한두 개의 대학이 있었을 뿐이며 대학생들의 인원도 작았다. 따라서 지방의 시위는 대부분 그 지방의 고등학생들이 주도하고 대학생들과 시민들이 동참하는 형태였다. 예를 들어 충북에서는 충주고를 시작으로 시위를 시작했고 참여한 학교는 청주고, 청주상고, 청주공고, 청주농고 등이였다. 실제 4.19 혁명 며칠 전 각 고등학교에서 그 학교들을 대표할 만한 사람들이 모여 거사일을 정하여 지금의 청주시내 도청 앞에 모여 시위를 하였고 경찰들의 곤봉에 수많은 학생들이 다쳤다. 자료는 그 당시 충청일보 신문을 보면 알 수 있다. 또한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사실이지만 서울 지역에서도 4.19 당일 맨 먼저 시위에 참가한 것은 의외로 대학생이 아닌 고등학생들이었다. 신설동 로터리에 있는 [[대광고등학교]] 학생들이 오전 8시 30분경 로터리를 점거한 후 동대문 쪽으로 쪽으로 행진을 시작했고 혜화동의 [[동성고등학교]] 학생들, [[경기고등학교]] 학생들 또한 합류하였다. 이 대열에 9시 이후 점차 대학생들이 합류하면서 학생 시위대가 형성된 것이다. 특히 동성고 학생 약 500명은 경무대 시위 때 서울대, 동국대 학생과 함께 주력을 형성하여 선두에 섰다고 알려져 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